이성이 잠든 밤에
프란시스코 고야 — 등불과 박쥐와 어둠 속의 식당, 세 장면
이어지는 이야기 3편읽는 시간 약 13분

1792년 겨울, 마흔여섯의 궁정화가가 병을 앓고 나서 소리를 잃었다. 무엇이 원인이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그 뒤로 서른여섯 해 동안 그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채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이다. 왕실 초상을 그리던 손은 차츰 총살대를, 박쥐 떼를, 제 아들을 뜯어먹는 늙은 신을 그리게 된다. 프란시스코 고야. 사람들은 그를 마지막 옛 거장이자 최초의 근대 화가라고 부른다. 올여름 서울 예술의전당에는 그의 판화 연작 『로스 카프리초스』 여든 장이 걸려 있고, 전시 제목은 그 가운데 한 장의 이름을 빌려 왔다. 이성이 잠들 때, 괴물이 깨어난다. 나는 그 문장이 새겨진 판화 한 장과, 그 앞뒤로 놓인 그림 두 장을 차례로 찾아가 보기로 한다. 프랑스 병사들이 총을 겨누는 언덕, 책상에 엎드린 화가, 그리고 마드리드 교외 어느 집의 식당 벽. 판화는 1799년, 총살은 1814년, 벽화는 1820년 무렵의 것이다. 시간순으로 걷지는 않기로 한다. 가장 밝은 등불에서 시작해 가장 어두운 방으로 내려가는 편이, 이 화가에게는 맞는 순서일 것 같다.
등불이 밝을수록 더 확실히 죽는다
1814년 2월, 프랑스군이 물러간 마드리드에서 고야는 임시정부에 편지를 보냈다. 위키피디아의 「The Third of May 1808」 항목이 옮긴 청원의 문구는 이렇다. 붓으로 "우리의 영광스러운 봉기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영웅적인 행위들을 길이 남기고" 싶다는 것. 여섯 해 전의 일이었다.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 시민들이 점령군에 맞서 봉기했고, 뮈라 원수는 그날로 포고를 내렸다. "봉기 중에 무기를 든 채 체포된 자는 모두 총살한다." 이튿날 새벽, 프린시페 피오 언덕을 비롯한 도시 곳곳에서 수백 명이 처형됐다. 고야가 그 장면을 직접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예순여덟이 되어서야 그날을 그렸다.
화면 오른쪽에 총살대가 있다. 우리는 그들의 등만 본다. 얼굴은 하나도 없다. 왼쪽에는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고, 바닥에 놓인 커다란 등불 하나가 그들을 비춘다. 흰 셔츠에 노란 바지를 입은 남자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있다. 오른손에는 성흔처럼 보이는 자국이 있다. 앞쪽에는 이미 쓰러진 시신이 있고, 무리 속에는 무릎 꿇고 기도하는 수도사가 있다. 미술사가 줄리언 벨은 뉴욕 리뷰 오브 북스에 쓴 글을 "그 노동자의 셔츠 위에 떨어진 끔찍한 눈부심"으로 시작한다. 빛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표적으로 만드는 그림이다. 등불이 밝을수록 그는 더 잘 보이고, 더 잘 보일수록 더 확실히 죽는다.
미술사가들은 오래전부터 이 그림을 근대의 문턱에 놓아 왔다. 위키피디아 항목이 인용한 케네스 클라크의 말을 빌리면 이 그림은 "양식에서도 주제에서도 의도에서도, 모든 의미에서 혁명적이라 부를 수 있는 최초의 위대한 그림"이다. 로버트 휴스는 좀 더 구체적으로 짚는다. 저 "등의 열이 여전히 최초의 진정한 근대 전쟁 이미지로 다가오는 까닭은, 억압의 익명성과 기계 같은 효율을 처음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프레드 리히트는 같은 항목에서 이 그림이 개인의 영웅적 순교 대신 "무익함과 무의미함, 대량 살상의 희생"을 그렸다고 본다. 그러니까 이 그림에는 영웅이 없다. 두 팔을 벌린 남자는 이기지 못한다. 휴스의 표현대로 고야는 여기서 "희생자들을 대변한다." 프랑스군의 보복에 죽은 마드리드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 전과 후에 인민의 이름으로 사라진 수많은 개인들을 위해서.
그림은 오래 보이지 않았다. 페르난도 7세가 복위한 뒤 민중 봉기는 왕실이 걸어 둘 만한 주제가 아니었고, 위키피디아 항목에 따르면 이 그림은 수십 년 동안 창고에 있다가 1845년 무렵에야 공개됐다. 휴스는 이를 두고 "국가의 주문이었음에도 생애 첫 마흔 해를 창고에서 보냈다"고 적는다. 그러나 한번 꺼내진 뒤로 그림은 멈추지 않았다.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이 이 구도를 이어받았고,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한국에서의 학살」이 그 뒤를 따랐다. 지금 이 그림은 프라도의 벽에 걸려 있다. 나는 등불 앞에 서서, 얼굴 없는 등의 열과 얼굴이 너무 잘 보이는 한 남자 사이의 거리를 잰다. 몇 걸음이 채 되지 않는다.
빛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표적으로 만드는 그림이다. 등불이 밝을수록 그는 더 잘 보이고, 더 잘 보일수록 더 확실히 죽는다.
향수 가게에서 팔린 괴물들

1799년 2월 6일, 마드리드의 일간지에 광고가 실렸다. 위키피디아의 「Los Caprichos」 항목은 그 판매 공고의 내용을 이렇게 전한다. 판매처는 데센가뇨 거리 1번지의 향수와 술을 파는 가게, 값은 여든 장 한 질에 320레알. 궁정화가가 자기 돈으로 찍어낸 풍자 판화집을 향수 가게에서 팔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거두어들였다. 팔린 것은 스물일곱 질이었다고 항목은 기록한다. 1803년 고야는 동판과 남은 판화 전부를 아들의 연금과 맞바꾸어 왕에게 바쳤다. 성직자와 귀족을 겨눈 그림들이었으므로, 항목이 적었듯 "종교재판소에 대한 두려움은 실제였다."
그 여든 장 가운데 마흔세 번째 판이 이 그림이다. 에칭과 아쿠아틴트, 21센티미터 남짓의 작은 종이다. 한 남자가 책상에 엎드려 있다. 펜은 손에서 떨어졌고, 얼굴은 팔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책상 옆면에 문장이 새겨져 있다.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 그의 등 뒤로 올빼미들이 날개를 펴고, 하늘에는 박쥐 떼가 검게 번지고, 오른쪽 아래에서는 고양잇과 짐승 한 마리가 눈을 뜨고 이쪽을 본다. 넬슨앳킨스 미술관의 해설은 이 남자를 고야 자신으로 보며, 밤의 짐승들에게 "포위된 채 잠든" 화가의 자화상이라고 적는다. 필라델피아 미술관도 이 판화가 "흔히 자화상으로 여겨진다"고 쓴다.
고야는 이 그림에 주석을 남겼다. 프라도에 보관된 필사본 해설의 문장을 넬슨앳킨스 미술관은 이렇게 옮긴다. "이성에게 버림받은 상상은 있을 수 없는 괴물을 낳는다. 이성과 하나가 되면, 상상은 예술의 어머니이자 그 경이의 원천이다." 그러니까 이 판화는 상상을 나무라는 그림이 아니다. 이성이 자리를 비운 사이 홀로 남은 상상이 무엇을 만들어 내는지 보여주는 그림이다. 로버트 휴스는 오른쪽의 스라소니를 눈여겨본다. 옛 그림에서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가 서 있을 자리에 "경계와 회의의 상징인 스라소니"가 대신 앉아 있다는 것이다. 그 짐승은 밤에도 볼 수 있으므로 "무지의 어둠을 꿰뚫을 수 있다." 화면에서 유일하게 깨어 있는 존재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 그림을 오래 붙잡는다.
위키피디아 항목에 따르면 고야는 원래 이 그림을 판화집의 표지로 쓰려 했다. 프라도에 남은 준비 소묘가 그 증거다. 그러나 최종판에서 그는 이 장을 한가운데로 옮겼다. 피츠윌리엄 미술관은 그 위치를 하나의 관문으로 읽는다. 앞쪽의 판들이 매춘부와 술꾼과 수도사를 다룬다면, 이 장 이후로는 마녀와 유령과 정체 모를 짐승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스페인어의 수에뇨(sueño)는 잠이기도 하고 꿈이기도 하다. 이성이 잠든 것인지, 이성이 꾸는 꿈인지, 제목은 끝내 정해 주지 않는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이 한 장이 연작 전체의 메시지, "이성이 부재할 때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경고"를 압축한다고 적는다. 서울의 전시가 이 문장을 제목으로 삼은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나는 엎드린 남자의 뒷덜미를 본다. 그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화면에서 유일하게 깨어 있는 존재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 그림을 오래 붙잡는다.
벽은 사라지고 벽에 그렸던 것만 남았다

1819년 2월 27일, 일흔세 살의 고야는 마드리드 교외 만사나레스 강가의 집 한 채를 샀다. 사람들은 그 집을 귀머거리의 집이라 불렀다. 위키피디아의 「Quinta del Sordo」 항목이 밝히듯 그 이름은 고야가 아니라 귀가 먹었던 이전 주인에게서 온 것이다. 우연이었다. 새 주인 역시 스무 해 넘게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이 집의 두 층, 식당과 거실의 벽에 직접 그림을 그렸다. 모두 열네 점. 주문한 사람도 없었고, 제목도 붙이지 않았고, 집 밖으로 나갈 일도 없는 그림들이었다. 그 가운데 한 점이 아래층 식당의 벽에 있었다. 항목에 따르면 맞은편 벽에는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가 있었다. 그는 아들을 먹는 신과 남자의 목을 자르는 여자 사이에서 밥을 먹었다.
눈이 먼저 보인다. 흰자위가 다 드러난 두 눈. 회색 머리칼이 헝클어진 늙은 신이 어둠 속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움켜쥔 작은 몸의 팔을 뜯어먹고 있다. 머리는 이미 없다. 자식 가운데 하나에게 왕좌를 빼앗기리라는 예언을 듣고 태어나는 아이들을 삼켰다는 사투르누스의 신화다. 위키피디아 항목은 고야가 같은 프라도에 있는 루벤스의 「사투르누스」를 알았을 것이라면서도, 루벤스의 신이 계산하는 이성을 보인다면 고야의 신은 "광기"를 보인다고 적는다. 프라도에서 안내 투어를 이끄는 미술사가 테레사 베가는 가디언에 실린 스티븐 펠런의 글에서 이 눈을 두고 말한다. 악이 아니라 "자신의 괴물스러움에 대한 일종의 충격"이 거기 있다고. 그러고 보면 이 신은 즐기고 있지 않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보고 있다.
벽화가 캔버스가 된 경위는 이렇다. 고야는 1824년 스페인을 떠나 보르도로 갔고 1828년 그곳에서 죽었다. 그해 화가 안토니오 브루가다가 집 안의 그림들을 목록으로 만들었다. 지금 우리가 부르는 제목들은 그렇게 나중에 붙은 것이다. 반세기 가까이 지난 1873년 무렵 프랑스 은행가 에밀 데를랑제 남작이 집을 사들였고, 1874년 프라도의 복원가 살바도르 마르티네스 쿠벨스가 벽에서 그림을 떼어 캔버스에 옮겼다. 펠런은 이 과정에서 그림이 "심하게 손상되고 일부는 다시 칠해졌다"고 적는다. 그림들은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내걸렸고, 영국 비평가 P. G. 해머턴은 고야를 "하이에나"라 불렀다. 남작은 1881년 이 그림들을 스페인 국가에 기증했다. 집은 1909년 헐렸다. 벽은 사라지고 벽에 그렸던 것만 남았다.
이 그림을 어떻게 읽을지는 아직 합의되지 않았다. 로버트 휴스는 검은 그림들의 메시지를 "누적된 절망"이라 부른다. 그러나 삼십 년 가까이 프라도의 고야 전문가로 일한 마누엘라 메나의 생각은 다르다. 펠런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말한다. "이 그림들에 대해 들리는 말이라고는 그가 이걸 그릴 때 미쳤고 우울했고 비관적이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는 사실 대단한 유머 감각을 지닌 낙관주의자였고, 생의 마지막까지 매우 이성적이고 매우 명료했다." 메나는 이 벽들을 고야가 "커다란 종이"처럼 쓴 것으로 본다. 카프리초스의 마녀와 도깨비가 그랬듯, 인간의 가장 나쁜 면을 비웃는 캐리커처라는 것이다. 줄리언 벨도 같은 물음을 던진다. 이것은 비극적 허무주의인가, 아니면 살아남은 자의 "더없이 거친 유머 감각"인가. 나는 어느 쪽인지 정하지 못한 채 방을 나온다. 그림 속 눈은 여전히 이쪽을 보고 있다. 절망이든 농담이든, 그것을 그린 사람은 매일 그 앞에서 저녁을 먹었다.
절망이든 농담이든, 그것을 그린 사람은 매일 그 앞에서 저녁을 먹었다.
서울과 마드리드에서 만나는 고야
고야의 유화와 벽화 원작은 프라도 미술관을 떠나지 않습니다. 서울 전시는 판화 연작 『로스 카프리초스』 여든 장을 중심으로 꾸며진 자리이므로, 이 글의 판화 한 장은 서울에서, 총살 그림과 검은 그림은 마드리드에서 보는 것으로 동선을 나누어 생각하면 좋습니다. 두 곳 모두 방문 직전 공식 페이지에서 운영 시간을 다시 확인하세요.
-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 (서울)《스페인의 거장 고야: 이성이 잠들 때, 괴물이 깨어난다》 — 『로스 카프리초스』 43번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
2026년 6월 26일부터 9월 30일까지, 매주 월요일 휴관. 주최 측 소개에 따르면 카프리초스 여든 장 판화가 전시의 중심이며 유화 대표작은 재현 방식으로 소개됩니다.
공식 안내 → -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1808년 5월 3일」과 검은 그림 연작의 「사투르누스」
총살 그림은 「1808년 5월 2일」과 나란히 걸려 있고, 귀머거리의 집 벽에서 떼어낸 열네 점은 한 전시실에 모여 있습니다. 두 방을 같은 날 보면 이 글의 순서를 그대로 걷게 됩니다.
공식 안내 →
공식 근거: 예술의전당 — 스페인의 거장 고야: 이성이 잠들 때, 괴물이 깨어난다 / 미술여행신문 — 한국 최초 단독 전시 고야전 (카프리초스 80점·귀머거리의 집 재현 소개) / Museo Nacional del Prado — Saturn (The Collection) / Museo Nacional del Prado — The 3rd of May 1808 in Madrid, or The Execu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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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사실과 해석은 아래 전문가·기관의 공개 자료에 근거합니다. 자세한 해설은 각 원본에서 확인하세요.
- 「The Third of May 1808」 항목 (1814년 청원·케네스 클라크·프레드 리히트 인용) · Wikipedia (출처표기)
- Robert Hughes, 「The Liberal Goya」 (1989) ·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출처표기)
- Julian Bell, 「Teeming with Things Unknown」 (2020) ·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출처표기)
- 「Los Caprichos」 항목 (1799년 판매 공고·27질·1803년 동판 헌납) · Wikipedia (출처표기)
- 넬슨앳킨스 미술관 소장품 해설 (Google Arts & Culture 게재) · The Nelson-Atkins Museum of Art (출처표기)
-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품 해설 (The Sleep of Reason Produces Monsters) · Philadelphia Museum of Art (출처표기)
- 피츠윌리엄 미술관 소장품 해설 (The Sleep of Reason Produces Monsters) · The Fitzwilliam Museum, Cambridge (출처표기)
- 「The Sleep of Reason Produces Monsters」 항목 · Wikipedia (출처표기)
- 「Quinta del Sordo」·「Black Paintings」 항목 · Wikipedia (출처표기)
- 「Saturn Devouring His Son」 항목 · Wikipedia (출처표기)
- Stephen Phelan, 「The Black Paintings」 (The Guardian 2019년 2월 게재, 마누엘라 메나·테레사 베가 인터뷰) · The Guardian / stephenphelan.co.uk (출처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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